┃양영민 작가의 photo & story┃인터뷰┃
임장식 진주시장도장전수교육관장
진주장도의 맥을 잇다
글.황경규/사진.양영민
재 제10호 장도장 기능보 유자인 임장식 관장은 경남 유일의 장도 공방인 진주시장도장전수교육관에서 진주 장도(粧刀)의 맥을 잇고 있다. 은장도 제작이라는 장인의 길을 걷고 있는 임장식 관장을 만나 진주 은장도에 대한 이야 기를 나누었다. <편집자주>

항공에서 바라본 진주시장도장전수교육관
은장도에 대한 관심이 높은 반면에 잘 모르는 분들도 많다. 은장도 이야기를 해달라.
임장식 관장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몸에 칼을 지니는 풍습(風習)이 있었다. 한 뼘 남짓의 이 칼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성인(成人)이 되면 옷고름에 달고, 허리춤에 차고,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며 잠시도 몸에서 떼지 않았다. 이 칼을 패도(佩刀, 차는 칼) 혹은 장도(粧刀, 꾸밈 칼)이라고 불렀고, 주머니에 넣어 다니면 낭도(囊刀)라 부르지만 그 본래 용도는 같다.
패도를 몸에 지녔던 이유는 남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 지키려 함이었고, 신념(信念)과 정절(情節)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의 다짐을 상징(象徵)하는데 두었다. 임진왜란 당시 선비와 여인들이 왜적(倭賊)에게 더럽힘을 당할 위기에 처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데 사용된 것도 장도이다.
예부터 은장도는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가?
임장식 관장 일상에서도 장도는 요긴하게 쓰였다. 칼이나 가위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 신분과 나이에 상관없이 생활필수품이었다. 집안의 일상생활에서 깎고, 자르고, 다듬는 일을 도맡았던 생활용품이라고 보면 된다. 더불어 사랑하는 딸을 시집보내는 친정어머니가 훈계(訓戒)와 함께 건네던 애정(愛情)이 담긴 선물이자, 아버지가 관례(冠禮)를 치르는 아들에게 하사하던 의식(儀式)의 상징이었다. 장도는 이처럼 행주좌와(行住座臥, 걷고 머물고 앉고 눕는 4가지 격식을 갖춘 태도나 차림새)의 생활 속에서 늘 함께했다.
은장도 한 자루가 완성되는 과정을 간단하게 설명해 달라.
임장식 관장 패도의 역사는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행스럽게도 당시의 아름다운 패도의 진면목을 실물로 볼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패도는 칼날을 수없이 불에 달군 뒤, 망치질로 단단하게 만드는데 정성을 쏟는다. 칼자루와 칼집은 금(金)·은(銀)·옥(玉)을 비롯해 나무·뿔·뼈·대·산호·나전칠기로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금·은·백동·구리 등으로 장식을 한다. 오색(五色)으로 물들인 명세(明細) 끈목으로 매듭을 지어 고리에 끼우면, 비로소 한 자루의 패도가 완성이 된다. 은장도 한 자루에는 수천 번에 이르는 장인(匠人)의 수고로움이 묻어 있다.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은장도의 구분이 있다고 들었다.
임장식 관장 조선 시대 장도의 특징은 장도에 젓가락이 부착되어 있다. 첨사도라고 부른다. 조선 시대는 신분제 사회였다. 이른바 당상관 이상은 상장도(上粧刀)를 사용하는데, 젓가락이 칼집 안에 들어있다. 그런데 당하관은 젓가락이 은장도 안에 들어 있다. 일반 양반들은 일반적인 은장도를 사용했고, 서민들은 목장도인 까치장도를 사용했다. 장도의 종류는 장식·형태·재료에 따라 나뉘는데 장식이 복잡한 갖은 장식과 단순한 맞배기가 있다. 첨사를 덧붙이면 첨사장도라고 부른다. 칼자루와 집을 꾸미는 재료에 따라 먹감나무를 사용하면 먹감장도, 대모를 사용하면 대모장도라고 하며 이밖에 많이 사용된 재료는 대추나무·화류나무·산호·화각·금·은 등이 있다.
이른바 쪼이질이라는 전통 기법을 고수하고 있는 이유가 있는가?
임장식 관장 전통의 가치는 지켜나가는 데 있다. 쪼이질은 한마디로 고생스럽다. 주물이나 프레스로 찍어내면 하루에 수천 개도 만들 수 있다. 문양도 레이저로 하거나 다른 방법도 많다. 하지만 장인의 손에서 나오는 손끝 맛이 없다. 칼자루와 칼집에 문양을 넣는 쪼이질 기법은 새가 모이를 쪼는 것처럼 정으로 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 자루 만드는데 말 그대로 수만 번도 넘는 쪼이질이 필요하다. 전통의 맥을 잇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그 전통을 고수해야만 한다. 그것이 장인이 가져야 할 기본 자세이다.
쪼이질은 한마디로 고생스럽다.
한자루 만드는 데 말 그대로
수만 번도 넘는 쪼이질이 필요하다.
전통의 맥을 잇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그 전통을 고수해야만 한다.
그것이 장인이 가져야 할
기본 자세이다.
은장도 제작에 있어 쪼이질 기법을 사용하는 곳이 있는가?
임장식관장 다른 장르의 무형문화재에는 쪼이질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들었다. 은장도를 만들면서 쪼이질을 하는 곳은 아마도 진주가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쉬운 일이다. 전통을 고수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힘들다고 해서 전통을 버려서는 안 된다. 쪼이질을 포기하는 것은 은장도를 포기하는 것 과 다름없다.

칼자루와 칼집에 문양을 넣는 쪼이질 기법
은장도의 칼날을 벼릴 때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한다고 들었다.
임장식 관장 쪼이질과 마찬가지로 칼날을 벼리는 작업도 고되다. 그래선지 은장도 공방에서 풀무질을 하는 곳은 아마 거의 없다. 쇠를 불에 달구고 수백 수천 번을 내리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만 제대로 된 한 자루의 은장도가 만들어 진다. 사실 제일 포기하고 싶은 과정의 하나이다. 그냥 편한 방법을 찾을 수 있지만, 은장도의 생명인 칼날을 현대문명의 이기에 떠밀려 포기한다는 것 역시 은장도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은장도를 만드는 전 과정이 순수한 수작업이다. 그것이 전통이고, 난 전통을 따르고 있다.
진주장도는
십장생문을 쪼이질로
새긴 문양 조각이 우수하다.
이것만 보면 진주은장도임을
알수있다.

칼날을 벼리는 작업
세월이 흐르면서 은장도가 장식품이 되고 있다.
임장식관장 작고하신 아버님(무도임차출옹)께서 은장도를 장식품용으로 만드는 것을 싫어하셨다. 칼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소신이었다. 그리고 ‘가격을 비싸게 받지 말라’는 유언도 남기셨다. 은장도를 더 많은 사람들이 지니기를 소망하신 것이다. 선친의 유언에 따르고 있다. 진주의 은장도가 싼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굳이 가격 비교를 한다면, 50만 원인 진주 은장도가 타지역에서는 200~300만 원에 팔리고 있다. 은장도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정말 힘든 상황이지만, 유언을 따르는 것이 제자이자, 아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진주 은장도의 역사를 간단히 말해준다면?
임장식관장 진주은장도의 역사는 울산 경상좌병영의 장도에서 시작된다. 부친인 경남무형문화재 제10호인 무도(撫刀) 임차출 옹이 울산 경상좌병영의 장도장이었던 김말호 씨로부터 장도 제작기술을 배웠다. 장도의 칼 몸체를 벼리는 기법과 전통적인 문양을 조각하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이후, 진주로 거처를 옮겨 정착했다. 아마 1977년쯤으로 기억한다. 사실상 진주 은장도의 시작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 진주에 는 장도를 만드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진주에서 처음부터 은장도를 만들었는가?
임장식 관장 진주에 와서 은장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은장도는 선물용으로 많이 만들었다. 그래서 은(銀)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고 본격적으로 은장도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진주로 오기 전, 울산 병영에서는 주로 목장도를 만들었다. 뿔장도도 많이 만들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들어오면서 병영이 없어졌다. 따라서 병기 제작 필요성이 줄어들었고, 이때부터 작은 장도와 담뱃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병기 제작에서 생활용품 제작으로의 변화는 시대적 요청이기도 했다. 그러나 담뱃대 역시 이른바 궐련이 나오면서 장도보다 더 빨리 사라지는 비운을 겪게 된다.그나마 장도는 그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그 맥을 잇고 있다.
무도 임차출 옹이 제작한 목장도 40여 점이 있다고 들었다.
임장식관장 선친께서는 은장도 못지않게 목장도도 많이 만들었다. 당시 목장도를 40여 종류가 넘게 만들 수 있는 장인은 대한민국에 없었다. 목장도와 은장도를 함께 제작할 수 있는 장인도 드물었다. 현재 진주에 목장도 40여종이 남아있다. 장도에 관심이 많은 한 분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다. 진주장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은장도의 도신에 새겨져 있는 글귀와 그 의미를 말해 달라.
임장식 관장 선친께서는 장도에 늘 글귀를 새겼다. 바로 일편심(一片心)이다. 패도(佩刀)의 도신(刀身)에 새겨진 이 명(銘)은 선인(先人)들이 패도를 지녔던 심지(心志)이자, 장인들이 패도의 전승에 혼신(渾身)의 정성(精誠)을 쏟고 있음을 상징하는 장인(匠人)의 언어이다. 일편심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면 진주 은장도라고 보면 된다.
선친의 뒤를 이어 진주 은장도의 맥을 잇고 있다.
임장식 관장 고등학교 즈음에 선친께서 풀무에서 칼날을 벼릴 때 옆에서 풍로를 돌렸다. 일명 바람잡이라고 한다. 그것이 은장도와의 인연의 시작이다. 본격적으로 은장도에 뛰어든 것은 군 제대 후이다. 당시 경상대학교 여증동 교수와 동아대 정상박 교수의 제의가 있었다. 전통공예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선친이 만드신 은장도 제작 기법을 그대로 전수받았다. 전통적인 ‘쪼이질 기법’을 이용한 은조각과 민화풍의 조각선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선친에게는 아직도 못 미치지만 나름 열심히 하고 있다.
최근에 와서 은장도가 그 가치를
인정받고 문화재가 되었다고 해서
‘작품’이 되고 엄청난 가격대를 호가하는
장식용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작품과 상품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사실 ‘가격을 비싸게 받지 말라’는
선친의 유언을 따르다 보니
생활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진주 장도의 현주소는 어떤가?
임장식 관장 장도는 1960년대부터 ‘상품’으로 제작되어 왔다. 당시만 해도 장도는 장식용품이 아닌 생활용품이었다. 엄연한 사실이다. 근데 최근에 와서 은장도가 그 가치를 인정받고 문화재가 되었다고 해서 ‘작품’이 되고 엄청난 가격대를 호가하는 장식용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작품과 상품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사실 ‘가격을 비싸게 받지 말라’는 선친의 유언을 따르다 보니 생활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야말로 근근이 먹고살 수는 있었다. 하지만 김영란법 시행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선물용으로 판매되던 은장도의 판로가 막혀 버린 것이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 은장도는 단 하나도 팔리지 않았다. 지원금과 관리비 이외에는 사실상 수입이 없다고 보면 된다.

진주 장도를 이을 사람이 필요하다.
장도장의 길은 가시밭길이다.
선뜻 나서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일차적으로
전통에 관심이 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꼭 이루고 싶은 것은
‘진주장도박물관’이다.
꿈이다.
은장도를 포함한 진주의 공예산업 활성화를 위해 시급한 일이 있다면?
임장식 관장 공예 하는 사람이 자신의 분야에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대안이 마련되면 좋겠다. 작품을 만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판로도 스스로 개척해야 하지만, 그 흔한 홈페이지 하나 없는 실정이다. 그냥 개인이 알아서 해야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고, 공예를 하는사람에게는 벅찬 일이다. 진주의 공예를 홍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 은장도 뿐 아니라 진주에는 한지, 염색, 칠보, 가죽, 구슬공예 등 각 종목의 작가들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유네스코 창의도시에 걸맞은 공예도시로 만들어나가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진주시장도장전수회관의 향후 계획이 있다면?
임장식관장 장도장 보존회를 만들 계획이다. 진주장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위한 자구책 정도로 보면 된다. 보존회의 구체적인 활동계획은 미정이지만, 진주 장도의 새로운 출발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진주의 은장도를 비롯해 진주공예의 활성화를 위해 진주공예학교를 운영할 계획이다. 진주공예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것은 물론 진주 공예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알릴 수 있는기회가 될 것으로 믿고 있다. 공예인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진주공예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점도 염두에 두고 있다.

진주 장도 발전을 위한 체계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먼 훗날 박물관에 가야만 진주 장도를 볼 수 있는 날이 올지 도모른다.진주장도의발전적계승을위해꼭하고싶은일이있다면?
임장식관장 당장 진주장도를 이을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을 찾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 장도장의 길은 가시밭길이다. 선뜻 나서는 사람이 있을리 만무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일차적으로 전통에 관심이 있으면 좋겠다. 그다음은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면 좋겠지만, 단지 희망사항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개인적으로 꼭 이루고 싶은 것은 ‘진주장도박물관’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광양장도박물관이 유일하다.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