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희/(사)진주민속예술보존회 이사장

진주의 교방문화는 150년이 넘는 오랜 역사성과 예술성을 갖추고 있지만 교방문화(기생문화)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홍보 부족으로 인해 진주의 문화유산으로 정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교방문화에 대한 정의를 내려 주신다면?
유영희 이사장 ‘교방문화’는 고려 시대 이후 교방에서 전래된 종합예술입니다. 반면, ‘기생문화’는 일제강점기 이후 형성된 일종의 사치 문화라는 점입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린다면 ‘교방문화’는 예절과 함께 가야금, 아쟁, 해금, 대금, 장고, 가사, 가곡, 시조, 검무, 아박무, 승무, 고무, 포구락무 등을 교육하는 종합예술문화로 말할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부터 전통을 이어받은 것을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교방이 설치되었고, 이를 통해 기녀들에게 악(樂)·가(歌)·무(舞)를 연습시키는 예인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해왔습니다. 각 지방에 감영이 설치된 곳에는 대부분 교방이 있어, 교육받은 기녀들은 지방관아에 모든 행사에 참여토록 했습니다. 또한 궁중에 큰 잔치가 있을 때면 지역 교방에서 예술이 뛰어난 기녀를 뽑기도 했는데 이를 ‘선상기’라고 합니다. 선상기는 목관아 교방의 예기(13세~14세)를 뽑아서 서울로 올려보냈다고 합니다. 그 예로 진주교방 출신 최순이 할머니가 마지막 선상기로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교방문화의 교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방 관아에서 행해지던 춤이 궁중으로 가고, 궁중의 춤이 지방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향발무나 아방무, 고무 등은 궁중춤이지만 춤의 교류에 따라 지방에 정착하게 된 경우입니다. 따라서 교방문화는 악가무를 갖춘 기녀들의 문화이지, 세속에서 말하는 ‘기생문화’는 아닙니다. 기생에는 종류가 있습니다. 구한말 고종 때 일패기생, 이패기생, 삼패기생으로 분류했는데 교방의 기생은 일패기생입니다. 종합예술인이 바로 교방의 기생입니다. 그래서 기생문화는 틀린 말입니다. 교방문화라고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일반 시민들은 교방문화를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문화말살정책의 하나로 시도된 기생문화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교방문화와 기생문화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떠한 것들이 있습니까?
유영희 이사장 교방문화는 교방에서 연행되던 악가무(樂歌舞)와 시서화(詩書畵)를 포함한 종합예술을 말합니다. 고려 시대부터 시작된 예기들의 종합예술문화이자, 그 역사도 오래된 우리 고유의 문화입니다.
최근 국립진주박물관에서 경남지역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모임인 ‘진주향당’ 주최로 「교방문화 그 풍류와 멋을 찾아서」를 주제로 심포지엄이 개최된 바 있습니다. 심포지엄에서도 기생과 공창에 대해 자세히 언급했습니다. 대체로 교방문화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교방문화’를 ‘기생문화’라고 비하 발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민족의 전통성과 유구한 역사문화를 왜곡하고 단절시킨 35년간의 일제강점기가 있었습니다. 사실 그 세월 동안 국민(시민)들은 진주관아에 교방청이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일제가 예인집단인 교방의 학생 즉, 기녀들을 창기로 만들어 모든 국민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이 뿌리박히도록 변화시킨 것이 오늘날 이처럼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교방문화가 제자리를 잡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시기를 지나면서 이른바 ‘기생문화’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자리 잡았고, 서구문화 유입 이후에는 기생=창기라는 인식이 고착화 되었습니다. ‘기생’이라 함은 일종의 ‘사치노예’라고 할 수 있으며 ‘기녀’는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라는 뜻에서 ‘해어화’라고도 흔히 말을 합니다. 이는 사회적 계급 분화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며 ‘기생문화’는 계층에 형성된 일부분의 지역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자료가 되는 문화원형을 의미한다면 ‘교방문화’는 역사성과 지역 정체성을 내포하면서 지역문화(악가무, 시서화)를 포괄하여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발전하는 데에 공헌한 종합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주에서 처음으로 교방문화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운창 성계옥 선생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운창 선생이 말한 진주의 교방문화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유영희 이사장 故 성계옥 선생은 1961년부터 진주검무를 배우기 위해 최순이 선생님과 강귀례 선생님을 만나 전수를 받기 시작합니다. 전수받을 때마다 최순이 선생님으로부터 교방과 궁중에서 행해지던 여러 작품들과 논개 제사인 의암별제와 선악 배따라기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평소 교방문화에 많은 관심을 보인 성계옥 선생은 지난 1975년 단국대학교 김동욱 교수를 통해 ‘교방가요’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에 성계옥 선생은 교방에서 행해졌던 의암별제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해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문교육학과에 입학합니다. 이후 교방가요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 끝에 마침내 1987년에 『의암별제지』를 발간하게 됩니다.
성계옥 선생은 지난 1986년부터 전국에 명성 높은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며 진주에 초청한 것은 물론 회원들에게 악·가·무를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됩니다. 성계옥 선생은 ‘유교식 제례를 교방의 기녀들이 지낸 사실’에 대해서 “이 모든 것이 교방문화이다”라는 말씀을 그때부터 하시게 된 것입니다.

운창 성계옥 선생은 진주교방문화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 주십시오.
유영희 이사장 故 성계옥 선생은 천년 역사 도시인 진주의 교방문화 복원과 계승·발전에 평생을 바친 예인이십니다. 성계옥 선생은 지난 1982년 후진 양성을 위하여 전수회관을 설립했습니다. 전수회관 설립을 위해 사유지를 제공한 것은 물론 스위스의 한 사업가에게 기부를 받아 신안동에 전수회관을 건립했고, 2001년까지 (사)진주민속예술보존회 회원들의 연습실로 사용했습니다. 1987년에는 『의암별제지』를 창간했고, 1986년부터 1998년까지 13년간 교방문화 인적 인프라 구축을 위하여 단기(6개월) 시립국악학교를 운영했습니다. 진주지역의 국악관현악의 발전을 위해 비상임 국악단을 운영(1989년~1998년), 1991년에는 경상남도무형문화재 제12호인 진주포구락무를 복원했습니다. 1992년에는 선생님의 염원이던 「의암별제」를 복원해 봉행했습니다. 2007년에는 「선악(배따라기)」을 복원하여 제48회 한국민속예술제에 출전하여 국무총리상을 받았습니다. 故 성계옥 선생께서 8년만 더 계셨다면, 늘 고민하고 계획하셨던 ‘향장무’를 발굴, 복원하는 데에 힘을 쏟았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의암별제 복원을 통해 논개정신을 되살리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여성의 가무제례를 진주의 문화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평생을 헌신적으로 살다가신 스승
운창 성계옥 선생님의 유지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의암별제의 복원은 진주교방문화의 꽃을 새롭게 피우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의암별제의 복원이 갖는 의의는 무엇입니까?
유영희 이사장 의암별제(義巖別祭)는 매년 음력 6월에 길일을 택하여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기생들만이 치른 대규모 의식으로, 악공을 제외하고 제관(祭官) 등 모든 의식을 여자(기생)들이 주관하는 독특한 제전이며, 선비들의 음악인 정악(正樂)을 사용한다는 점을 특징으로 하는 행사입니다. 1868년 고종 5년 당시 진주목사이던 정현석은 진주병사(경상우도병마절도사)와 의논하여 논개의 사당을 다시 중건한 뒤, 춘추상제와 별도로 매년 6월 중 길일을 택하여 논개에 대한 제향을 실시토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의암별제였습니다.
기생의 문화와 국악에 관심이 많았던 정현석은 논개에 대한 불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제의와 가무로서의 의암별제를 만들었습니다. 조선 시대 종묘(宗廟)에서 역대 임금을 제사 지낸 종묘대제(宗廟大祭)나 문묘(文廟)에서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성인들과 한국의 유학자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제외하고서 이처럼 음악과 노래, 춤이 어우러진 제사의식을 치른 경우는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의암별제의 여흥가무 속에는 교방의 많은 춤들이 포함되어 있기에
의암별제야말로 교방문화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암별제는 논개의 충절을 기리는 제례의식입니다. 조선 시대 예악을 중시하던 사회에서 제사에 가·무·악을 올리는 것은 최고의 예로 간주했습니다. 의암별제가 문화유산으로서 가치를 지니는 이유가 바로 이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례의식이 끝나고도 3일 동안 이어지는 여흥가무는 바로 교방문화의 꽃이자 현대 문화축제의 효시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의암별제 복원을 통해 논개정신을 되살리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여성의 가무제례를 진주의 문화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평생을 헌신적으로 살다가신 스승 운창 성계옥 선생님의 유지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의암별제의 여흥가무 속에는 교방의 많은 춤들이 포함되어 있기에 의암별제야말로 교방문화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의암별제는 비록 진주교방의 기녀와 진주의 민관군이 주축이 되어 치른 제례지만, 우리 민족의 수난기에 전국에서 모여든 이들이 함께했던 민족적 성격의 축제였다는 점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의암별제의 복원 과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유영희 이사장 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이 상실되면서 의암별제의 운명도 달라졌습니다. 당시 기생들은 조선말 의암별제에서 가무를 했던 노기들의 뜻을 받들어 향불이라도 피우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 의암별제는 결국 일제 때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해방 이후, 의암별제는 복원되지 못하고 의기창렬회라는 단체를 통해 의기사에서 겨우 논개에 대한 제사만 지냈을 뿐, 의암별제는 전설 속으로 사라질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의암별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성계옥 선생의 의지는 남달랐습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최순이 할머니로부터 진주검무를 직접 전수받은 성계옥 선생의 노력으로 의암별제 복원사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의암별제에 대한 문헌이 국립중앙도서관 고문서 수장고에서 발견되었고, 정현석의 『교방가요』란 책을 입수하게 된 성계옥 선생은 사실상 의암별제의 복원을 결심하게 됩니다. 정현석이 지은 『교방가요』는 의암별제의 제례 과정이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어 사실 복원에 있어 완벽한 복원을 가능케 했습니다.

성계옥 선생의 수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1987년 『의암별제지』가 간행되었고, 이후, 논개제향에 대한 모든 사무를 이어받은 성계옥 선생은 진주민속예술보존회를 중심으로 의암별제 복원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1992년 의암별제가 촉석루에서 감격적으로 재현되었습니다. 국권상실로 단절된 의암별제가 8·15 광복 이후 처음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해 중양절(양력 10월 4일)에 개최된 의암별제에 대해 성계옥 선생은 “이번에 재현하는 의암별제는 바로 그 의기 논개를 위한 제례행사입니다. 제례이긴 하지만 봄가을에 제를 지내던 것과는 별도로 의암별제는 음악과 노래와 춤으로 원혼을 달래던 특별한 제사였습니다”라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의암별제의 복원은 민족정신의 회복이자, 진주의 문화유산으로 반드시 보전하고 계승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현재 의암별제의 경상남도 지정 무형문화재 등록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추진상황과 향후 전망은 어떻습니까?
유영희 이사장 故 성계옥 선생의 열정적인 노력 끝에 1992년 복원된 의암별제는 올해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봉행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28년간을 선생님과 우리 회원들은 묵묵히 지켜왔습니다. 교방문화의 정수로서 문화재로 지정해 온전히 보존하여 계승시켜 나가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지만 제가 무지한 탓으로 아직도 지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암별제의 온전한 보존을 위하여 좀 더 자료를 체계화하여 문화재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더욱 더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의암별제의 문화재 지정은 진주 문화예술의 위상을 정립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의암별제가 가지는 가치를 인정받는 날이 빨리 올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故 성계옥 선생의 열정적인 노력 끝에 1992년 복원된 의암별제는 올해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봉행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28년간을 선생님과 우리 회원들은 묵묵히 지켜왔습니다

얼마 전 진주교방문화의 활성화와 계승·보존을 위한 제언의 성격을 담은 ‘진주교방문화의 멋과 맛을 찾아서’라는 언론사의 기획특집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후 진주교방문화 발전을 위한 어떤 움직임이 있었습니까?
유영희 이사장 진주교방문화를 발전시키고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진주에도 진주문화유산원의 설립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진주의 문화유산을 전승하고 보존하는 전문단체의 설립은 교방문화의 활성화 측면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진주민속예술보존회는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창립을 앞두고 있는 진주문화유산원에서 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사업과 교방문화단지 조성 등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방문화단지는 진주의 교방문화를 한눈에 보고, 듣고, 체험할 수 있는 매우 필요한 시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교방문화의 산업화를 위해 교방음식 등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일은 교방문화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방문화연구소 등의 설립이 가능하다면 저희들도 적극 참여해서 진주교방문화 활성화에 일익을 담당할 생각입니다.
진주교방문화의 역사와 예술성을 맛볼 수 있는 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대한 의견은 어떻습니까?
유영희 이사장 진주교방문화의 역사성과 예술성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진주교방문화단지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조성이 시급한 시점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진주교방문화라는 큰 정책을 민간단체에서 수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진주시와 국회의원 등의 정치권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할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교방문화가 가진 예술의 전통성과 문화원형을 통한 프로그램의 개발과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고, 경상남도 진주시청, 교육청, 지역주민이 주도적으로 참여한다면 분명히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진주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해서는 대시민 인식개선 사업 등의 추진이 시급하다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홍보를 전담하는 조직 등의 설치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유영희 이사장 진주시민의 인식개선이 우선 이루어져야 되겠지요. 그 방법은 인식개선을 위한 교육과 홍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는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에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미디어 영상, 유튜브 등 다양한 홍보자료를 위한 전문 콘텐츠팀을 구성해 운영해야 교방문화를 세계적인 문화로 이끌어갈 수 있다고 봅니다.
진주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한 향후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유영희 이사장 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해서는 교방 관련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교방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지역시민모임 구성과 교방문화를 연구하는 교방문화연구소 등의 기관 설립, 마지막으로 교방문화의 홍보를 전담하는 홍보팀을 구성해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활성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주시와 교육청의 노력과 힘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선대의 공헌과 희생으로 만들어진 문화유산을 잘 이어받아 그동안 많은 발전과 규모를 확장시켜냈지만
예산 운영, 연령 고령화 등의 한계에 이르러 진주시의 예산 지원이 절실히 필요한 실정입니다.
그리고 의암별제가 빠른 시일 내에 문화재로 지정받는다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진주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한 진주민속예술보존회의 향후 역할이 있다면?
유영희 이사장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와 경상남도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포구락무를 비롯해 정재기본무, 고무, 향발무, 남무, 입춤, 살풀이춤, 소고춤, 장고춤, 지전춤 등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통악기 분야인 장고, 좌고, 대금, 피리, 해금, 가야금 등은 물론 가곡, 민요는 물론 대작품인 ‘의암별제’, ‘선악(배따라기)’ 또한 전승에 게을리하지 않고 열심히 할 것입니다.
선대의 공헌과 희생으로 만들어진 문화유산을 잘 이어받아 그동안 많은 발전과 규모를 확장시켜냈지만, 예산 운영, 연령 고령화 등의 한계에 이르러 진주시의 예산 지원이 절실히 필요한 실정입니다. 그리고 의암별제가 빠른 시일 내에 문화재로 지정받는다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의암별제’가 문화재로 지정받을 수 있도록 많은 지지와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 진주희망탐사100은 진주지역 각 분야별 최고 의사결정권자 100인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를 통해, 진주의 희망을 찾아내는 공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