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오브 진주2|
다시, 晋州精神이다
진주정신의 재정립이 필요한 시점이다. 천년 진주역사의 맥(脈)을 잇는 올바른 시대정신, 제대로 된 사회적 가치가 지역사회에 뿌리 내려 있는지 자문할 시기에 이르다는 의미이다. 과연 진주에 천년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시대정신(時代精神)과 시대가치(時代價値)가 살아 숨 쉬고 있는가.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진주역사에 대한 각성의 측면에서도 그렇고, 진주가 진주인 의미를 찾는 노력에 있어서도 그렇다.
다시, 진주정신을 기억하고 떠올려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진주의 시대정신과 사회적 가 치체계를 정립해 진주의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 ‘다시, 진주정신이다’가 경남도청의 부산 이전으로 대표되는 진주의 침체기와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혁신도시 정착 등 새로운 도약 을 앞두고 있는 진주의 정신적 원동력이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편집자주>
1. 진주정신과 시대정신
2. 진주정신과 전주정신
3. 진주정신을 찾아서
4. 진주정신 정립과 계승
3. 진주정신을 찾아서
조선 후기 대표적인 역사가의 한 사람인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조선 초기부터 조 때까지를 담은 『열조통기(列朝通紀)』를 지어, 우리 역사의 체계를 세우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순암은 그의 저서인 『동사강목(東史綱目)』 서문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의 임무를 다음과 같 이 제시했다.‘역사가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계통을 밝히고, 찬역을 엄히 하 고, 시비를 바로잡고, 충절을 포양하고, 전장(문물)을 자세히 하는 것이 다.(史家大法 明統系也 嚴簒逆也 正是非也 褒忠節也 詳典章也)’
순암은 그 과정에서 ‘고증’을 중시하여 과거의 역사 기록을 단순히 취사하 여 조술(祖述)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 역사를 통해 면면히 흐르는 정신 (精神)을 읽어내고 다시 기록하는 일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역사에 대한 기록은 가벼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진주역 사를 찾는 일은 천년 역사 속에 담겨있는 진주의 정신문화를 찾아내, 진주 의 명예와 자긍심을 회복하는 일이기에 더 늦출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더 불어 그동안 잊고 살아온 진주역사에 대해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 이기도 하다.
진주인의 기질, 낙선호의
진주의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진주는 경상도를 대표하는 지역이 다. 진주의 역사가 곧 경상도의 역사이므로 진주의 기질이 곧 경상 도의 기질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진주로 대표되는 경상 도민들의 기질을 평가하는 기록을 통해 진주의 정신문화적 가치와 평가의 일단을 발견할 수 있다.태조 이성계가 조선팔도 사람들의 특징을 한 구절로 평(評)하라는 명 을 내렸다. 이에 조선의 기틀을 다진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은 조선팔도 사람들의 기질을 평하면서 경상도(慶尙道)의 기질을 ‘송죽 대절(松竹大節)’이라고 표현했다.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곧은 절개’ 를 가진 도민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조선의 실학자들은 전국 팔도의 지세(地 勢), 지리(地理), 지형(地形)을 보면서 해당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인성(人性)이 서로 다르다는 지리인성론(地理人性論)을 주장했다. 조선 정조 때 대사간을 지낸 윤행임(尹行恁, 1761∼1801)은 경상도 민을 ‘태산교악 설중고송(泰山喬嶽 雪中孤松)’과 같은 기질을 갖고 있다고 평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태산교악은 크고 높고 험 한 산과 같이 웅장하고 험준한 기개를 말하며 일반적으로 덕(德)과 명망(名望)이 태산처럼 높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을 지칭하 는 말로 사용되며, 설중고송은 눈 속의 고독한 소나무와 같은 추상 같은 기상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조선 조 때의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은 조선팔 도의 지역적 특성을 볼 때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慶尙右道) 의 사람들은 의(義)를 숭상하고, 경상좌도(慶尙左道) 사람들은 인 (仁)을 지향한다고 했다. 특히 경상우도(慶尙右道) 사람들의 기질 을 ‘낙선호의(樂善好義)’라고 평가했다. 즉 ‘착한 일 하는 것을 즐겨 하고 의로운 일(사람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 하는 것을 좋아한다’ 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의 참모로 조선에 왔던 두사충(杜師忠)의 사 위인 나학천(羅鶴天)의 팔도 인물평도 주목할 만하다. 중국 건주 (建州) 출신으로 장인과 함께 조선에 귀화한 나학천은 경상도 사람 의 기질을 ‘우순질신(愚順質信)’ 즉 어리석고 순하지만 참된 기질이 있다고 표현했다.
조선 시대 지리학자들은 조선팔도의 땅에 대 한 풍수지리적 해석을 하면서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생각해, 산천의 형세가 좋으 면 좋은 인물이 태어난다고 하는 지리인성론 (地理人性論)을 주장했다. 지형의 형세가 지 역민의 성격 형성에도 많은 향을 미친다고 주장한 것이다.
지리인성론을 통해 살펴본 진주의 기질적 특 성이 반드시 역사적 사건에 내재된 정신문화 와 일치성을 갖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 만 이러한 지역 특성으로 인해 형성된 진주 만의 독특한 정신문화는 진주의 역사적 인물 을 통해 확인된다.
인물(人物)로 본 진주정신
두 차례의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 정치의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자 처했다.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매 진하면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중요시 여겨 ‘경(敬)’ 과 ‘의(義)’를 강조했고, 경상우도 학문의 특 징을 이루었다.
남명은 사림정치가 시작되는 명종~선조 전 대를 대표하는 학자로 평생 재야에 머물며 일생을 마쳤지만, 정치가 반드시 지위를 통 해서만 구현되는 것이 아님을 직접 증명했다.

남명 조식
남명의 호의정신을 이어받은 제자들은 진주 를 중심으로 남유학의 맥을 이어옴과 동시에 국난극복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동강 김우옹(지수), 각재 하항(수곡), 수우당 최경(상대동), 신암 이준민(금산), 운당 이염(조동), 모정 하진보(대곡), 무성 하응도(대평), 조계 유종 지(수곡), 무송 손천우(수곡), 부사 성여신(금산), 신계 하천주(대 평), 백곡 진극경(백곡) 등이 그들이다.
남명의 제자들은 국난(國難)과 부정(不正)이 있을 때마다 남명의 실천유학이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임진왜란과 구한말 남지역의 구국의병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남명을 주축으로 한 남학파의 사상적 근간인 실천유학은 선도적 역할을 했으며, 이를 통해 진주가 민족정신(民族精神)의 발원지가 된 근원이 된다.
진주는 민족정신의 발원지
남명 조식 선생의 호의정신과 제자들의 민족정신 발현과 함께 진주 정신을 잇는 대표적인 인물은 의기(義妓) 논개(論介)이다.
의기 논개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성을 지키 던 7만 민관군이 전몰하자, 왜장을 의암으로 유인해 투신해 순국했 다. 이후 진주사람들은 논개의 의열정신을 받들어 1629년 진주선 비 정대륭이 의암 자를 새기고, 1722년에는 의암사적비를 세웠 다. 1740년 조선 조정은 조선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논개의 순국정신을 기리는 사당인 의기사를 세우도록 명한다. 논개가 의 로운(義) 기생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몇 해 전에 대한민국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의기 논개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여인상’ 5위에 올라 의기 논개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확인하는 기회가 있었다. 더불어 의기 논개의 매 서운 의열과 정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의기 논개가 단 순히 진주정신의 맥을 잇는 진주의 논개가 아니라 민족정신의 맥을 잇는 조선의 논개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은 ‘의기암’이라는 시를 통해 매국노를 준엄하게 꾸짖으면서 진주정신의 맥을 이은 논개의 의열 아카이브 오브 진주|191 남명 조식 정신을 칭송했다. ‘빼어나다 우리나라 역사에/기생으로 의암을 남 겼구나/한심하다 고기로 배부른 자들/나라 저버리고 아직도 무얼 탐하는가’ 논개의 의열정신은 구한말 본주(本州) 기생인 산홍(山紅)으로 이어 졌다. 산홍은 기생이라는 천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매수 하려는 매국노 이지용을 꾸짖었다. 왜장을 안고 순국한 의기 논개 의 정신과 닮아 있다. 산홍은 의기 논개의 충절과 정신을 이어가지 못하는 자신의 부끄러 움을 담은 시(詩) 한 편을 지었다. 산홍이 의기사를 참배하고 지은 「의기사감음(義妓祠感吟)」이 바로 그것이다. ‘천추에 빛나는 진주의 의로움/두 사당과 높은 누각에 서려 있네/세 상에 태어나 뜻있는 일도 하지 못하고/풍악을 울리며 헛되이 놀기 만 함이 부끄럽네’
과거 진주사람들은 의기 논개의 죽음을 헛되이 두지 않았다. 일반 백성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초월해서 논개의 의열과 충 절을 기렸다. 그리고 마침내 ‘관기(官妓)’에서 ‘의기(義妓)’로, 다시 ‘진주 정신’의 한 맥으로 이어왔다. 본주 기생 산홍의 정신 역시 마 찬가지이다.
논개의 정신을 잇다
일본 헌병과 경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진주성을 비롯한 진주 곳곳 은 만세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이때 한 무리의 아낙네들이 만세를 외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우리나라 3·1독립운동 최초의 진주 의 기생독립단이었다. 이들은 대형태극기를 앞세우고 남강변을 돌 며 촉석루를 향해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계속했다. 이들은 “우리가 이 자리에서 칼을 맞아 죽어도 우리나라가 독립되면 여한이 없다” 라고 소리치며 조금의 동요나 굽힘이 없었 다. 이들의 독립운동은 의기 논개의 나라사 랑 정신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후 진주에는 학생의거(3월 21일)를 비롯해 미천면의거(3월 22일), 수곡면의거(3월 22 일), 문산읍의거(3월 25일), 정촌면의거(3월 18일), 유림의거(5월) 등이 연이어 일어났고 참가한 인원이 무려 3만여 명이 넘었다. 남명 과 임진왜란 의병, 의기 논개, 산홍, 걸인·기 생독립운동은 지금도 진주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정수리에 퍼붓는 냉수 한 바가지
민족시인 허유(許洧, 1936∼)는 「진주(晋州)」 라는 시에서 진주를 ‘새벽잠 끝에 정수리에 퍼붓는 냉수 한 바가지’처럼 그야말로 제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듬어야 할 곳이라고 표현했다.
진주정신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금이라도 진주정신을 찾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것이 진주정신이 뿌리 내려 있는 진주 땅을 밟고 살고 있는 우리의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